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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문도 (El Mundo)

모잠비크 지도자 : 에두아르두 몬들라니

by 77 Harvey 2020.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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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모잠비크의 지도자 : 에두아르두 몬들라니

 

모잠비크 체류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마푸투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주요 도로의 하나가 아베니다 에두아르두 몬들라니(Av. Eduardo Mondlane)입니다. 바다 쪽 동쪽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길을 따라 한참 가노라면 동상 하나가 나오는데 이게 에두아르두 몬들라니의 동상입니다. 그리고 마푸투 시내 지도에서 보면 북쪽으로 넓은 캠퍼스를 갖고 있는 국립대학 이름이 에두아르두 몬들라니 대학입니다. 모잠비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사람 입장에서 에두아르두 몬들라니가 대체 누구이길래 이렇게 기념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에두아르도 몬들라니 대학은 마푸투 시내 북쪽에 위치하며 1962년에 설립된 국립 종합대학으로 재학생 수는 4만 명입니다.

 

 

에두아르두 쉬밤부 몬들라니(Eduardo Chivambo Mondlane)는 총가(Tsonga)족 한 부족장의 열여섯 자녀 중 네 번째로 1920년에 태어났습니다. 형제 중 아무도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몬들라니는 어머니의 특별한 관심으로 스위스 미션스쿨과 미국계 농업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이후 남아공화국으로 옮겨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요하네스버그의 한 대학에 진학하였는데 당시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인종분리정책에 따라 일 년 만에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다음 해에 좋은 기회를 맞아 모잠비크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곳에서도 정치경찰에 시달리다가 장학재단의 배려로 31살 나이에 미국 오하이오주 Overlin 대학 3학년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인류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그는 일리노이 Northwestern University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으며 백인 여성을 만나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흑인으로서는 드물게 높은 학력을 갖게 되어 아프리카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1955년 즈음 모잠비크 6백만 흑인 인구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겨우 10명 정도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몬들라니는 학업을 마친 후 유엔의 한 부서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아프리카로 출장 다녀온 후 정치 활동하겠다는 작정으로 연구원직을 사임하였습니다. 이후 잠시 Syracuse University에서 조교수로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모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대학을 사임하고 모잠비크 바로 옆 탄자니아로 갔습니다. 몬들라니가 유엔에서 근무할 당시 포르투갈에서 36년간 실권자로 군림하였던 Salazar 총리 측근인 해외영토부 장관 Adriano Moreira 교수가 그를 만나 모잠비크 총독부에서 일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몬들라니는 이를 거절하고 지도자가 필요했던 모잠비크 독립운동 전선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62년 그는 독립운동 세력의 하나였던 모잠비크 자유전선(FRELIMO, 현재 집권여당의 전신 조직임)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FRELIMO 본부를 탄자니아 다레살렘에 설치하고 구 소련 및 서구 국가와 인근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포르투갈과 게릴라전을 선포하였습니다. 당시 FRELIMO 지도부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쪽은 단순히 흑인 정부로의 대체를 원하고 있었던 반면 그가 이끌던 그룹은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몬들라니 사회주의 노선은 전당대회에서 승인을 받고 68년에 재차 FRELIMO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사무실로 배달된 우편 폭탄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그의 암살이 포르투갈 중앙정보부나 비밀경찰의 소행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내부 반대세력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먼 나라의 일이지만 우리나라 상해 임시정부 및 해방 후 과도기 기간 중 세력 간 다툼이 연상됩니다. 김구 선생이 국내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하게 된 거나 식민지 독립세력들이 서구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에 편향되고 있는 것도 똑같습니다.  

 

FRELIMO 게릴라들은 모잠비크 중부 및 북부 농촌지역 일부를 점유하고 포르투갈 정부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1974년 포르투갈에서 쿠데타 정변 발생 후 해외영토 포기정책에 따라 1975.6.25일 FRELIMO에 모든 전권을 이양하고 모잠비크는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몬들라니 이후 FRELIMO를 이끌던 사모라 마샬(Samora Machel)이 정식으로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는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소련, 쿠바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에 따라 남아공, 로데지아 (현재의 짐바브웨) 등 인근 국가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회주의 계획경제 실패와 인근국과의 관계 악화로 국내 경제가 더욱 나빠지자 이틈을 타서 북부지역 중심으로 RENAMO (모잠비크 저항운동) 반정부 세력이 일어나게 되어 이들이 남아공과 로데지아의 지원을 받으면서 모잠비크는 80년부터 12년간의 긴 내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내전 기간 중 약 100만 명이 사망하였고 수백만명의 피난민이 발생하고 국가는 최빈국으로 떨어졌는데 1992년 유엔 중재 아래 FRELIMO와 RENAMO 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내전을 종식하면서 양당체제로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내전을 종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1년간 대통령으로 집권했던 사모라 마셀이 1986년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후 2대 대통령으로 집권한 시사누 (Joaquin Chissano) 대통령이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친서방, 친시장 경제노선과 대폭적인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다당제를 도입해 민주화 발전의 기반을 마련한 덕분이기도 합니다. 시사누는 헌법에 의해 연속 출마가 가능했지만 3선 출마를 거부하고 사퇴함으로써 이후 선출된 대통령들도 5년 임기의 재선 이후에는 사퇴하는 전통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마푸투 시내에는 레닌 거리, 마오쩌둥 거리 등 사회주의 노선 때 공산국가 지도자들의 이름을 따라 지은 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김일성 거리는 구간은 짧지만 깨끗하고 부유한 동네였습니다. 

 

 

어느 나라나 식민지배를 받던 나라들이 독립하는 과정에서의 혼잡한 상황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한다는 사람들은 결국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파벌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내부 반대세력 간 견제가 심했을 것으로 상상됩니다. 이들은 식민 본국으로부터도 신변 위협을 받으며 활동했기 때문에 독선적이어서 민주적 절차보다는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많은데 몬들라니처럼 일찍 사망함으로써 오히려 더 추앙받게 되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의 남침 도발로 불과 몇 개월 만에 사라질 뻔하다가 미국과 유엔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다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3년간의 내전을 겪었지만 그래도 강대국들이 간섭했기 때문에 그나마 3년으로 휴전을 맺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모잠비크는 비슷한 세력 간 내전으로 한쪽이 압도적이지 못하니까 결국 12년간 내전을 겪게 된 것입니다.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내전으로 현재 40대 이상의 모잠비크 인들에게는 그때의 굶주림과 불안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모잠비크에서 느꼈던 것은 이들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후진국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거라는 전망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625 전쟁 후 피난 내려왔던 월남 가족들이 전쟁 재발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해외 이민을 떠난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개발로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최빈국의 하나에서 선진국 문턱에까지 올 수 있었지만 작금은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욕심이 애꿎은 일반인들을 편 가르기와 국가경제 불안으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이 너무 답답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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