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동네 아이들이 싸우던 광경이 생각납니다. 키 작은 아이가 큰 애한테 얻어맞아서 코피가 터졌습니다. 작은 애가 일어나서 코를 한번 세게 풀더니 손에다 흐르는 피를 탁탁 바르고 다시 주먹 쥐고 덤비니까 큰애는 기가 죽어 더 이상 싸울 생각을 못하고 피하기만 하면서 수세에 몰리는 걸 보았습니다. 이 장면은 작은 애가 기(氣)로 상대를 제압한 것입니다. 반면 기가 한번 꺾인 큰 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피하거나 막으려고만 하지 더 이상 공격적이지 못합니다.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갑과 을, 상사와 부하 등 관계에서 상대를 갑이라고 일단 인정하면서 자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스스로 기가 꺾여서 더 이상 상대에게 대들기 힘들게 됩니다. 그 둘의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이 보면 "아니 왜 그렇게 절절매고 있냐, 한번 받아버리지 그래" 등 답답하다는 듯이 얘기하지만 한번 기가 꺾인 사람에게는 어려운 주문입니다.
동창 친구들끼리 당구장에 모여 삼삼오오 당구게임을 즐기고 있는데 한 친구가 늦게 나타나서는 여기 제일 센 사람이 나하고 돈내기 한번 붙자 하고 호기롭게 외칩니다. 그 친구는 기(氣)가 센 사람입니다. 그 기(氣)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氣)란 무엇일까요? 한자의 훈(訓)으로 보면 기운 기(氣)라고 읽습니다. 기운이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오관으로 느껴지는 현상입니다. 기분이 좋다 할 때의 기는 흐름입니다. 기 막힌다는 건 병목현상이 생겨 기의 흐름이 막힌 것을 말합니다. 기의 흐름이 끊기게 되면 기절하게 됩니다. 반면 기가 잘 흐르면 기통(氣通) 차다(기똥차다의 어원이라는 설도 있음)라고 말하고 기가 부족하면 허기(虛氣)라고 표현합니다. 도교에서 말하는 기(氣)는 인간을 비롯한 자연계의 모든 것을 생성시킨 생명과 물질의 동적에너지 그 자체를 뜻합니다. 기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풀 수 있는 사고의 중심으로서 만물의 생성과 변화는 기의 집산(集散)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교에서는 도(道)를 기(氣)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이의 율곡전서에서는 마음이 곧 기(氣)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氣)를 영어로 표현하면 뭐라고 할까요? Energy, Spirit, Soul 등 여러 단어들이 있는데 연예 프로그램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아우라(Aura)나 포스(Force)라는 말도 그럴듯해 보입니다.
당구를 잘 칠 수 있는 건 기(氣)와 같은 발음이지만 다른 뜻의 재주 기(技)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Skill 이며 Technique 입니다. 재주 기(技)는 연습과 훈련에 의해 얻어질 수 있지만 기량(技倆)이 일정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잘 늘지도 않고 컨디션에 따라 들쑥날쑥합니다. 그래서 각종 운동경기의 프로들은 시합에 임할 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떤 날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날은 한없이 추락하는 슬럼프도 있기 마련입니다. 관중들은 프로가 최고의 기량을 보여줄 때 열광합니다. 한편 골프나 당구에서 기량이 부족한 아마추어들에게는 핸디가 적용됩니다. 기량이란 때와 장소나 기분에 따라 좌우되고 일정하기 어렵기 마련인데 그 기량을 기준으로 핸디가 매겨졌으니 그 핸디라는 게 정말 합리적 수준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은 높이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일부러 낮추려고 합니다. 짜다느니, 허당이라느니 으레 친구들 간 핸디에 대한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게임의 승부를 결정짓는 데에는 기(氣)나 기(技)를 넘어서는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건 감(感)입니다. 감(感)은 느낄 감인데 승부에 대해서는 기량 기와 기운 기를 초월하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초반에 어떤 느낌이 오게 됩니다. 패배할 것 같은 느낌도 있고 이건 이길 수 있다 하는 느낌도 있습니다. 내가 크게 이기고 있는 중에도 아직 경기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에 불안할 때가 있고 내가 뒤떨어지고 있어도 어쩐지 뒤집을 수 있다는 느낌이 강해질 때가 있습니다. 내 경우 당구는 멘털 게임이라고 생각해서 항상 이길 수 있다 하는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내가 친 스트로크가 제대로 길을 따라 정확히 들어갈 거라는 암시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 어려운 포지션에서 거짓말같이 볼이 들어가게 되거나 때로는 역전에 성공하게 되는 건 그런 느낌을 갖고자 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두고 마음 심(心)으로 감(感)을 제어하려고 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패배할 것 같은 불안한 감이 들 때에도 이길 수 있다 하는 마음속 주문으로 현상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상대에 대해서는 내 기(技)나 감(感)이 그의 기(氣)에 눌려 작동하지 않는 걸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기(氣)가 너무 세서 감당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별 수 없이 담담하게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승부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지 않았나요? 누가 맨날 이기는 상대를 좋아하겠습니까? ㅎㅎ 어떤 날은 컨디션이 나빠서, 기량이 부족해서 지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상대의 기가 세서 지는 날도 있고 방심하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날도 있는 겁니다.
심법(心法)은 기(技), 기(氣)와 감(感)을 초월합니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기고자 하는 욕심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技)를 기(氣)로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기(氣)를 기(技)로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욕심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서 23전 23승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길 수 있을 때에만 전투를 하였고 준비된 전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숫적 열세나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거짓말 같은 승리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보통사람들은 이기고 있을 때, 또 유리할 때 크게 이기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선조가 보기에는 금방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해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부산 앞바다로 나가서 바다 건너오는 적을 섬멸하라고 지시했는데 이순신 장군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역적으로 몰리게 됩니다. 보통사람들은 참 감당하기 어려운 인내심입니다. 그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다스렸던 난세의 영웅이었습니다. 어떤 게 욕심을 버리는 건지 잘 알 수도 없지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오늘은 당구 얘기하다가 그만 너무 깊이 들어갔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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