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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학년 이야기

거짓 와이로 이야기

by 77 Harvey 2021. 3. 23.

 

거짓 와이로 이야기

 

거짓 얘기가 카톡을 통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와이로'라는 말을 지금 젊은 사람들은 아마 알지도 못하고 들어 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사문화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와이로를 기억하고 있는 나이 든 계층 사이에서 이런 가짜 얘기가 돌아다니며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받으면 일단 진위여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합리적인가 아닌가에서부터 어디서 유래된 건지, 언제쯤부터 이 얘기가 나왔는지 확인이 가능하다면 찾아봐야 합니다. 인터넷 정보의 바다에서 몇 번만 클릭하면 웬만한 얘기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대부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귀가 얇은가 봅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잘 믿고 또 남에게도 잘 전달합니다. 가짜 얘기일수록 진짜같이 들리고 옮기는 사람도 신 나나 봅니다. 선거철만 되면 가짜 뉴스를 만들어 상대를 흠잡고 그거로 재미 보는 놈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범죄자는 놈이란 소리를 들어도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아니면 말고 하는 식에다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그동안 신나게 상대를 두들겨 팰 수 있다는 얘기인데 그런 것에 넘어가는 국민이 문제인가요? 나중에라도 잘못되었으면 그런 말을 퍼뜨린 자는 매장을 시켜야 하는데 잘못이 드러나도 "그래서 뭐"라던가 "미안하다고 했잖아"라던가로 끝납니다. 염치가 없는 겁니다. 염치없는 건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 아주 오래전에는 무슨 얘기든지 신문에 나왔다고 하면 모두 믿어주었습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수, 종교인, 정치꾼 등 직업군이나 마찬가지로 언론인들도 쓰레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사실 팩트는 없고 좌우 진영논리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사실을 완전히 다르게 두 가지로 보도하니 정말 믿을만한 게 못됩니다. 정의, 공정, 정직, 민주 이런 얘기 하는 사람들의 행동거지는 이들이 내뱉는 말과 완전 상반되고 있습니다. 

 

가짜 와이로 얘기는 이렇습니다. 와이로가 뇌물을 뜻하는 일본말(わいろ, 賄賂 회뢰)인데 일본말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려시대 고사에서 유래된 단어라는 주장입니다. 이건 국뽕도 아니고 무식입니다. 처음에 만든 사람은 장난으로 시작했을텐데 검증 없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된다 생각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한 끝에 나름 신뢰할만한 내용을 보게 되어 이를 소개합니다. 거짓 얘기에서는 와이로(蛙利鷺)가 개구리 와와 이로울 리, 백로 로로 만들어진 단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말 발음에서 이로울 리는 초성이 아니면 이로 읽을 수 없는 겁니다. 1952년 한 일간지에 "늙은 호랑이가 개구리를 받아먹고 꾀꼬리를 일등으로 꼽았다"는 내용의 비슷한 우화가 조경희 수필가 이름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이 우화는 "산중의 늙은 호랑이가 어찌 흑백을 가릴 수 있어 양심과 정의를 논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도였다는데 '와이로'와는 전혀 무관하였다고 합니다.

 

아래에 카톡방에서 가져온 글을 소개합니다만 이를 옮기는 사람은 앞에다 일본말인 줄 알았다는 사족까지 달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 이규보(1158-1241)는 고려시대 유명 문인입니다. 그는 과거시험에 3번 떨어진 끝에 4번째 겨우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출세를 위해 최충헌 무인정권에 아부했던 속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대서사시 동명왕 편을 짓고 2천여 편의 글을 남겨 자칭 주필 이당백이라고 했다는 천재 문인입니다. 한편 아래 카톡 글에서 나오는 의종은 고려 18대 왕으로 재위 기간(1146-1170)이 이규보와는 안 맞아 오류로 보입니다.

 

 

중국 송대에 실시된 과거시험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하는 카톡방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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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와이로'가 일본말인 줄 알았는데... ㅠㅠ

 

🌷와이로(蛙利鷺)🌷

 

고려시대 의종 임금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夜行)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이 민가(民家)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고자 청을 했지만, 집주인이 조금 더 가면 주막(酒幕)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임금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그 집 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했다.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唯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

 

"도대체 개구리가 뭘까..?"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어느 만큼의 지식(智識)은 갖추었기에, 개구리가 뜻하는 걸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막에 들려 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으면서 주모에게 외딴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외딴집 주인은 이규보로서 그는 과거(科擧)에 낙방(落榜)한 후 마을에도 잘 안 나오며, 집안에서 책만 읽으면서 살아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發動)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사정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은 안 오고 해서 면담(面談)을 신청(申請)했다. 그리고는 궁금하게 여겼던 "唯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이란 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옛날에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까마귀가 꾀꼬리한테 내기를 하자고 했다. 바로 "3일 후에 노래 시합을 하자"는 거였다. 백로(白鷺)를 심판(審判)으로 하여 노래 시합을 하자고 했다. 이 제안에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하기는커녕 목소리 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자신에게 노래 시합을 제의하다니.. 하지만 월등한 실력을 자신했기에 시합(試合)에 응(應)했다. 그리고 3일 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반대로 노래 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 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백로(白鷺)한테 뇌물로 가져다주고 뒤를 부탁한 것이었다.

 

약속한 3일이 되어서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 곡씩 부르고 심판인 백로(白鷺)의 판정을 기다렸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기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결국 심판인 백로(白鷺)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동안 꾀꼬리는 노래 시합에서 까마귀에 패배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백로가 가장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다 주고, 까마귀가 뒤를 봐 달라고 힘을 쓰게 되어 본인이 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꾀꼬리는 크게 낙담하고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라는 글을 대문 앞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 글은 이규보(李奎報) 선생이 임금한테 불의와 불법(不法)으로 뇌물을 갖다 바친 자에게만 과거 급제의 기회를 주어 부정부패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比喩)해서 한 말이었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란 말이 생겼다.

 

와(蛙): 개구리 와. 

이(利): 이로울 이. 

로(鷺): 백로 로.

 

이규보(李奎報) 선생 자신(自身)이 생각해도 그의 실력(實力)이나 지식(智識)은 어디에 내놔도 안 떨어지는데 과거를 보면 꼭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돈도 없고 정승(政丞)의 자식(子息)이 아니라는 이유(理由)로 과거를 보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와 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가 백로(白鷺)한테 개구리를 상납한 것처럼 뒷거래를 하지 못하여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여 초야(草野)에 묻혀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李奎報 선생의 품격이나 지식이 고상(高尙)하기에 자신(自身)도 과거(科擧)에 여러 번 낙방(落榜)하고 전국(全國)을 떠도는 떠돌이인데, 며칠 후에 임시(臨時) 과거(科擧)가 있다 하여 개성으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궁궐(宮闕)에 돌아와 즉시 임시 과거를 열 것을 명(命)하였다고 한다. 

 

과거(科擧)를 보는 날, 이규보 선생도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準備)를 하고 있을 때 시험관이 내 걸은 시제(詩題)가 바로 “唯我無蛙 人生之限” 이란 여덟 글자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 선생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큰 절을 한 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서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차후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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