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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문도 (El Mundo)

바스쿠 다 가마의 모잠비크 기항과 인도항로 개척

by 77 Harvey 2020.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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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초 유럽은 지구 상의 다른 문명들과 별다른 접촉이 없었습니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등지에 관한 소문을 겨우 듣고 있는 정도였지만 그들이 세상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그만큼 폐쇄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동방에는 소금 못지않게 귀중한 후추, 생강 등 양념류 향료가 무진장하고 또 귀한 비단도 풍부하다는 얘기를 듣고 동방에 대한 동경이 커지고 있었는데 이때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은 그들의 모험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17세기까지 유럽인들은 세계 곳곳의 바다를 누비며 항로를 개척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험과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미지 세계에 대한 동경과 탐험은 언제나 있었지만 이때만큼 활발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 과학기술이 발달한 것도 한몫한 셈인데 먼바다로 나갈 수 있는 범선이 만들어졌고 중국에서 온 나침반이 항해에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개선되었습니다. 또 지구가 둥글다는 과학적 발견과 지리학 발전도 먼바다로 나아가고 싶은 이들의 용기를 북돋은 셈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프레스터 존이라는 전설을 믿고 있었는데 이는 아프리카 내륙 또는 동방에 기독교인 프레스터 존이 세운 강력한 왕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은 그들과 연결하면 이슬람 세력을 양쪽에서 공격해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향료를 얻기 위해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면서 그 기독교 국가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동기와 경제적 동기로 동방 세계를 찾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항로를 찾는다는 것은 개인사업으로 불가능할 만큼 리스크가 많은 대규모 투자였습니다. 먼바다로 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배와 많은 선원이 필요하고 당시 첨단장비인 나침반과 대포 등의 장비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투자가들도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투자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업에 과감히 투자한 국가들이 바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이들은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보다 해외로 진출하고 싶은 욕심을 더 느꼈으며 또 일찍이 통일국가를 형성하고 있어 사업을 추진할 능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항해왕자로 불리는 엔리케는 1420년대부터 잘 조직된 탐험대를 보내 성과를 조금씩 거두고 있었습니다. 탐험대는 약간의 금과 1천 명이 넘는 흑인 노예들을 잡아왔습니다. 

 

포르투갈은 지리적 이점으로 항해시대의 문을 연 개척자였습니다. 이슬람 세력의 팽창으로 아시아와의 육로 무역이 어렵게 되자 바다로 나아가 인도와 중국에 닿고자 하였는데 이를 실현한 인물이 바스쿠 다 가마 (Vasco da Gama 1469-1524)였습니다.  포르투갈은 적도를 넘어 아프리카 서쪽 연안을 탐험하기 시작하였는데 1488년 항해사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이 지원하였던 콜럼버스가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데 자극을 받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는 인도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바스쿠 다가마를 대장으로 삼아 1497년 7월 4척의 배와 168명의 선원으로 인도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그해 11월 희망봉에 다다른 바스쿠 다 가마는 아프리카 동쪽 연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모잠비크와 케냐의 몸바사를 경유하고 인도양을 건너 다음 해 5월 인도 캘리컷(현재의 코지코드 Kozhikode)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돌아올 때는 그보다 더 많은 기간과 희생이 필요하였습니다. 당시 배들은 범선이었기 때문에 바람이 없는 날에는 항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배 위에서 오랫동안 지내야 하는 선원들에게는 음식과 영양상태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괴혈병으로 죽는 선원이 속출하여 리스본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불과 1/3인 55명만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항해에서는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콩, 비스킷, 소금에 절인 육류뿐이어서 선원들은 신선한 채소를 먹지 못해 괴혈병에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음료수도 얼마 지나면 썩기 때문에 포도주를 따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훗날 1519년 마젤란의 세계일주 탐험에서는 출발인원 256명 중 3년 뒤 이들이 돌아오기까지 단지 18명만 생존해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인도항로 개척은 동방세계에 대한 무력점령의 시작이었습니다. 인도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 현지에서도 포르투갈은 무역이라는 목적 외에 기독교 포교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문화적 마찰을 심하게 일으켰습니다. 1502년 바스쿠 다가마가 두 번째 인도로 갔을 때에는 15척의 선단으로 많은 병사들을 인솔하고 가면서 현지에 있던 이슬람 상선들을 습격하고 배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슬람 세력과 연합해 대항하던 캘리컷의 통치자를 무력으로 제압한 바스쿠 다 가마는 병사들만이 아니라 항구에 사는 어부와 상인들까지 많이 학살하였습니다. 바스쿠 다 가마는 캘리컷 외에도 인도 각지에 무역사무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이 일로 포르투갈은 인도양에서 제해권을 차지할 수 있었으며 인도와의 독점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은 역사적인 일이겠지만 무자비한 학살과 착취로 부정적인 면도 많았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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